복수, 용서 그리고 무관심! 


뉴스100 김동초 기자 |

 

 

복수, 용서 그리고 무관심! 

 

검은 토끼해인 계묘년이 왔다. 토끼는 육식생태계에서 최하위 층일 것이다. 그래서 늘 먹이사슬 제일 밑바닥에서 당하고만 산다. 인간들은 당하면 복수라는 개념을 제일 먼저 떠올린다. 그러나 과연 토끼는 복수라는 개념을 알까(?)라는 어리석은 의문이 들었다. 복수의 본질은 과연 무엇일까!

 

폐북에 어느 고수가 이런 말을 실었다. 약한 자는 복수를 하고 강한 자는 용서를 한다.

그리고 현명한 자는 무시한다고 했다. 이 말을 쉽게 받아들이면 쉬웠지만 필자 같은 하수 입장에선 대가리가 좀 복잡해지는 문구다.

 

복수도 힘과 집념이 있어야 한다. 격투기경기에서 흔히 벌어지는 복수전 소위 리벤지도 그 만큼 강해야 리턴매치가 벌어지는 것이다. 약자는 복수한다는 표현보다 복수밖에는 그가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 때가 아닌가 싶다.

 

강자는 용서를 한다고 했다. 그 말에는 동의를 한다. 어느 영화에 나오는 대사가 생각났다.

“용서도 힘 있는 넘이 하는 거야 이 쉽세리야” 집단구타를 당해 처참하게 일그러진 주인공의 쪽팔리는 면상을 내려 보며 악당이 한 대사였다. 그래서 그 순간 악당이 멋있게 보였던 것이 생각났다.

 

그렇다 용서는 강자가 하는 것이지 약자는 용서가 아닌 포기가 될 것이다. 아무리 좋게 생각을 한다고 해도 용서는 관용일 뿐이다. 약자가 하는 용서는 어지간한 상황이 아니면 어울리지도 않고 이해도 어렵다. 푸념 같은 궁시렁거림 정도가 될 것이다.

 

그리고 현명한 자는 무관심을 택한다고 했다. 의미로 본다면 이미 초월을 한 사람의 행동으로 보인다. 아니면 정말 그 정도의 힘이나 배경이나 인격적 통달이 상대에게 커다란 데미지나 피해를 입었어도 무관심하게 대할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인간계를 살짝 벗어나 신계의 초입에 있어야 가능하지 않나 싶다.

 

암튼 필자 같은 속물들의 입장에선 용서만도 어마어마한 수양이 쌓여야 하는 데 무관심은 아마 죽기 전까진 갖추기 어려운 선택일 것이다. 토굴 앞에서 햇볕을 가리고 서있는 알렉산더 대왕에게 비키라고 일갈한 디오게네스 정도가 아니라면 행하기 어려울 것이다.

 

어찌 보면 약자가 행하는 복수가 제일 인간미가 풍긴다고 볼 수도 있다. 그 복수라는 것이 또 다른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거나 처절하지 않다면 어느 정도의 복수가 인간사회를 위한 필요악일 수도 있을 것이다.

 

왼뺨을 얻어맞고 또 오른 뺨까지 내줄 정도의 도량은 갖추기도 어렵고 오른 뺨 대신 딱 밤이라도 한 대 치고 돌아서는 게 아마 전쟁과 지옥 같은 신(쩐)자유주의 우선의 이사회를 살아가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개인은 타인을 복수하거나 용서 할 수도 있다. 아니면 고도의 내공으로 무관심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정치인은 아니 국가를 운영하는 자와 정부는 옳고 그름의 귀감을 세움이 당연한 의무이며 치세의 기초다.

 

정치판에서도 복수와 용서를 넘어 무관심이 일상화 된다면 그 국가와 사회는 신들만의 세계가 될 것이다. 이곳은 인간계이기 때문에 인간스럽게 살아야 한다.

 

그래서 다소 강하고 거칠게 느껴지더라도 바로 잡을 수 있는 것은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반드시 바로잡고 가야한다. 현세대를 사는 우리가 어느 정도의 아픔을 겪더라도 우리후손에겐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을 물려주어야 한다. 글을 쓰면서 늘 느끼는 감정이 있다.

 

나는 가끔씩 속물과 얼치기현인 사이를 오가는 느낌이다. 그래서 인간답고 나답다고 느낀다.

몹시 망가진 인생을 살았지만 다시 태어나도 이꼬라지로 살 것 같다.

생긴 대로 사는 게 가장 자연스럽고 가장 인간다운 것 같다. 지금은 몹시 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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